인천 - 바르샤바 - 카토비체
해외에서 오래 살았고 상대적으로 평균보다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고 생각했는데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과는 인연이 없었다 (아시아 여포) . 처음 아시아 이외의 대륙을 여행한 건(탈아입구?) 2011년 호주 시드니였고 유럽보다 아프리카(탄자니아)를 먼저 가 봤고 — 여행도 아니고 그냥 일하러 간 거 — 미국도 뉴욕에 2021년이 되어서야 처음 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인데 뉴욕은 미국이 아니다. 미국을 대표하기엔 다른 지역들과 너무 다르다. 하긴 미국은 50개의 서로 다른 나라가 한 나라인 척하는 국가라는 농담을 생각해보면 뉴욕만 그럴까 싶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뉴욕은 뉴욕주의 다른 도시들과 다른, 그 자체로 아예 별도의 한 도시국가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따지면 미국도 제대로 안 가 본 거고 그러니까 미국도, 유럽도 안 가 보고 무슨 여행 많이 다닌 척했냐고 할 수도 있는데,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남들은 대학생 때, 20대 때 한 번쯤은 가본다는 유럽 여행을 — 물론 이것도 굉장히 편협한 나의 기득권에 기반한 생각과 버블이다. 접근성 좋은 일본 여행도 못 가서 평생 한 번 가 보는 게 소원인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 나는 작년에야 처음 갔으니 말이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많이 가는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나라도 아니고 생뚱맞은 스웨덴이었으니 나는 아직도 유럽 여행을 '제대로' 안 가 본 사람일 수도 있다. 중간에 런던을 들르긴 했지만 2박 3일의 매우 짧은 일정이어서 정말 후다닥 첫 방문에 봐야할 랜드마크 휘리릭 둘러보는 데 그쳐서 다음에 좀 긴 일정으로 런던 방문을 메인으로 한 여행을 하고 싶다.
어렸을 땐 세계 여행이 꿈이었다. 여기저기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체험하는 게 좋았다. 방학 때마다 이번엔 어디를 갈까를 고민하고 계획을 짜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나는 일이었다. 살면서 나름대로 인생의 여러 가지 부침을 겪고 일상에 찌들어가며,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가 된 지금은 그저 이 모든 게 피곤하기만 했다. 처음 온 변화는 더 이상 여행 자체가 재밌어서 가기보다 일상의 주변 환경과 루틴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가는 도피성 여행으로 여행의 성격이 바뀌고 — 단적인 예로 과거엔 여행 가면 하루 들러야 할 곳들, 하고 싶은 것들 리스트가 빽뺵해서 싼 숙박시설과 교통시설 찾아다니고, 먹을 거 아껴가면서 빨빨거리고 돌아다녔는데 어느 순간 그저 호텔에만 늘어져 있다가 나가도 숙소 근처만 한바퀴 산책하고 돌아오는 식으로 바뀌고 예전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이걸 못하면 어떡하지?'하는 FOMO(Fear of Missing Out) 심리도 없어졌다. — 도피성 여행마저도 싫증이 나는 단계에 도달하자 그냥 휴일엔 집에 있는 게 제일 좋아졌다. 무엇보다 여행이 주는 기쁨보다 가령 대중교통을 타고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밟고, 게이트에서 비행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탑승을 하고 지루한 비행을 뻐근한 몸으로 견디면서 맛없는 기내식을 먹고, 목적지 국가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심사를 위해 긴 줄을 기다리고 끝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를 보다가 짐을 찾으면 잠시 모든 일정이 끝난 느낌이 들다가도 아직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숙소로 이동할 교통편을 알아보고 마침내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푸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느끼는 피곤함과 스트레스가 더 커지면서 여행을 계획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여행이 즐겁지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도 계획했던 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언젠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줄 몰랐다.
그러니까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퇴사를 하고 나니 MJ와 나는 실업자 백수 커플이 된 것이었다.
둘 다 시간이 많이 남게 되니 자연스레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나누게 되었는데, 어쩌다가 내가 MJ에게 마지막으로 폴란드를 가본 게 언제냐고 물어보자 2년이 넘었다고 했다. 작년엔 폴란드를 못 간 대신 동생이 서울에 놀러 와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다 앞으로 둘이 동시에 같이 일을 쉴 타이밍이 또 언제 올지 모르고 MJ는 집을 안 간 지도 오래되었고 나는 폴란드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으니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같이 가자는 이야기가 나와 자연스럽게 일이 추진되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몇 주 더 밍기적대다 보면 공휴일이 몰려 있는 휴가 시즌이라 비용이 더 비싸질 것이고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가 계획도 흐지부지 될 것 같아서 곧장 돌아오는 주 월요일 출국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여행 스케줄을 짜고 숙박시설 예약을 했다. 인생 이렇게 즉흥적으로 살아도 되는 것인가
같이 폴란드를 방문하지만 방문 목적이 서로 약간은 달랐기 때문에 — 나는 아무래도 여행, 관광이 주 목적인 반면 MJ는 가족 방문이 더 우선순위였으니까 — 약간의 일정 조율과 타협이 필요했는데 덕분에 바르샤바 말고는 폴란드의 다른 지역들은 거의 모르고 딱히 방문할 생각도 없었던(왜냐하면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내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혼자 여행을 했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바르샤바에서 보냈을 텐데, 이번 여행에서의 베이스캠프는 카토비체가 되었다. 카토비체에서는 MJ의 부모님 댁에 머무르기로 해서 숙박 비용도 절감되고 여러모로 좋은 선택인 셈이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로 MJ 부모님을 뵙게 될 줄이야…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데 그걸 몸소 체험하는 중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서유럽/영국보다 동유럽에 더 큰 흥미를 느꼈고 폴란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 중 하나였다. 그중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쇼팽이다. 이건 나중에 따로 더 다룰 예정.
사실 "동유럽"으로 분류되는 체코,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의 나라들은 스스로를 "동유럽"이 아니라 중부 유럽(Central Europe)으로 부르고 동유럽으로 불리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고 한다. 동유럽이라는 분류에 대해서도 하려면 책 한 권이 나올 수 있는 주제이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동유럽이라는 분류 자체가 서구 유럽 중심 관점에서 같은 유럽이지만 변방, (서유럽보다 뒤떨어진) 2등 유럽 등의 의미를 암묵적으로 내포하는 용도로 사용되어 세계사를 다룰 때에도 별로 다루어지지 않는 지역이며 무엇보다 '동유럽'으로 분류되는 나라는 하나로 묶이기엔 너무 다양한 문화와 인종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냉전시대의 산물로 하나로 묶여서 소비되는 바람에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용어라는 비판이다.
관련 내용에 더 관심 있다면 제이콥 미카노프스키(Jacob Mikanowski)의 저서 <굿바이, 동유럽>을 읽어보길 권한다.
교보문고 · 도서 정보굿바이, 동유럽제이콥 미카노프스키ISBN 9791192913940
출처: 인스타그램 @parksundal.insta
덕분에 LOT — 폴란드어로 비행(Flight)을 의미한다고 한다 — 폴란드 항공도 처음 이용해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 폴란드로 가는 직항은 LOT 항공 하나밖에 없는데, 놀랍게도 인천에서 바르샤바 외에도 브로츠와프 직항도 있었다. 아마 한국 기업 공장들이 브로츠와프에 많이 있어서 수요가 좀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린 바르샤바행 티켓을 끊었다.
원래 10시간 정도 소요되는 비행시간이 러-우 전쟁으로 인해 우회해야 해서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 더 소요되었다. 하여간에 전쟁은 하등 도움이 되는 게 없다. 10시간 비행도 힘든데 2시간 넘게 비행 시간이 추가되다니 MJ와 나는 분노하여 푸틴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긴 비행이라 기내식이 두 번 나왔는데, 요즘은 더 이상 그렇지 않지만 예전엔 이 항공사 기내식은 어떨까 하는 기대와 궁금증에 기내식을 먹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아침 기내식: 소고기와 면 or 닭고기와 밥 중 고를 수 있었는데 나는 소고기와 면을 골랐다. 김치가 같이 나온데다 볶음고추장도 같이 줘서 이게 무슨 조합이지 싶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음

저녁 기내식: 아침과 다르게 선택지가 없었다. 떡볶이와 김말이를 기내식으로 주는 건 처음 봤다. 과일이 제일 맛있었다.

거의 다 왔다...
공항에 도착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입국 수속도 끝내고 짐도 다 찾았는데 출구를 안 열어줘서 한 30분간 복도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 도착!

폴란드가 미식으로 유명했었나? 생각하면 뭔가 떠오르는 음식이 없는데 — 베이글의 유래가 폴란드 유대인들로부터 유래했다는 것 정도? — 여기저기 미슐랭 가이드 추천 음식점 광고와 Taste Poland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폴란드도 이제 미식의 나라 이미지를 밀고 싶은 것일까?

식당 설명을 보고 너무 궁금해서 가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가본 곳
출국 전 MJ와 이런저런 여행 일정 상의를 한 끝에 바르샤바는 출국하기 전에 돌아와서 돌아보는 걸로 하고 도착해서는 바로 카토비체로 이동하기로 했다. 바르샤바에서 카토비체행 버스가 있긴 한데 늦은 밤 시간에 한 대 있어서 그때까지 뜨는 시간을 공항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보냈는데 인천공항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별로 국제공항이라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시간도 시간인지라 닫은 곳도 많았고.

폴란드에서 첫 빵과 커피. 유럽빵은 어디나 맛있다

공항 까페 앞에 놓여있던 그랜드 피아노
쇼팽의 나라답게 공항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오픈 스테이지처럼 아무나 와서 칠 수 있는 공간이라서 궁금해서 나도 나중에 잠깐 쳐봤는데 큰 기대는 없었지만 역시나 관리가 엉망인 상태… 공항에 이용객들이 자유롭게 칠 수 있는 그랜드 피아노가 설치된 것은 오키나와 공항에서 처음 봤었는데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게 확실히 아시아권 사람들은 좀 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다거나 많은 걸 '민폐'의 개념으로 생각할 때가 있어서인지 오키나와에서는 어느 정도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분들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아이들이 피아노를 쳐보고 싶어서 칠 때에도 보호자가 하나만 치고 내려와라라는 식으로 컨트롤을 하는데 여기선 아무나 대충 장난처럼 뚱땅거리고 가도 신경도 안 썼다. 어떤 분은 아예 동네 피아노 연습실처럼 이용하셔서 잘 안 되는 부분만 무한 반복 연습을 하셨는데, 편의점을 들러서 뭐 먹고 왔는데도 계속 치고 계셨다. 덕분에 앞으로 스콧 조플린(Scott Joplin)의 The Entertainer는 아마 꽤 오랫동안 듣고 싶지 않아졌다.

이런 안내 문구가 다 무슨 소용이람

보드카의 나라답게 편의점 한 편을 꽉 채우고 있는 보드카 세션
공항 한복판에 놓인 이것은 무엇인고?
웬 미니 박물관인가 싶었는데 공항 압류품들을 전시해 둔 거라고 한다.
주로 반입금지 품목으로 지정된 동물 관련 물품들

카토비체 버스터미널
심야버스를 타고 드디어 카토비체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훌쩍 넘었다. 첫날부터 고된 여행 일정이었다. 거리는 정말 한산하고 조용했다. MJ 어머니께서 터미널 택시 타는 곳엔 택시가 많을 테니 아무거나 타고 오면 된다고 하셨는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택시가 한 대도 없어서 결국 핸드폰으로 호출을 해서 한참을 기다려야했지만 적당히 쌀쌀한 온도와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공기 때문인지 몸이 피곤한 것 말고는 다 좋았다.

Midnight in Katowice
드디어 MJ 부모님 댁 도착!
눈물겨운 이산가족(?) 상봉의 순간을 목격하고 짐 정리를 하고 나니 어느덧 아침이 밝아오게 생겼다. MJ에게 말했다. 다음엔 바르샤바에서 1박은 하고 좀 더 여유롭게 오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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